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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EP14. That's how you become a sock philanthropist.
    • EDIT BY 구달 | 2024. 1. 9| VIEW : 47

    어김없이 새해가 밝았다. 매년 해오던 대로 탁상달력을 교체하고, 미리 사둔 드로잉 일력을 꺼내 첫 장을 펼쳤다. 몹시 귀엽게 생긴 용이 빛나는 여의주를 꼭 움켜쥔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옜다’ 하는 표정이다. 신년에 용이 여의주를 주겠다는데 아니 받을 수 없지. 일력을 살살 뜯어 반으로 곱게 접어 지갑에 넣었다. 신통력을 지녔다는 이 영묘한 구슬이 올해 좋은 기운을 가득 안겨 주기를 바라면서.

    매년 착실히 나이를 먹어 왔지만 올해는 유달리 기분이 묘하다. 마침내 앞자리가 ‘4’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마흔이라니, 달리는 지하철 4호선에 탑승해 버리다니. 달나라를 여행하거나 알약 한 알로 한 끼를 때우는 미래는 상상했어도 나 자신이 40대가 되는 미래는 상상해 본 적이 없다. 하루에도 천 번을 흔들리는 내가, 작가로서의 장래가 여전히 불투명한 내가, 자차를 보유하기는커녕 운전대 잡는 법도 모르는 내가 불혹을 맞이한 게 정말일까? 양말 가게를 찾은 손님이 40대에게 선물할 양말을 골라 달라고 부탁하면, 늘 당연하다는 듯이 차분하고 우아한 뉴트럴 컬러 양말을 추천하곤 했었다. 한데 40대 당사자가 된 나는 어떤지. 꽃분홍색 파자마에 춘식이 수면 양말을 신고 있지 않은가.

    생각난 김에 양말 서랍을 열어 보니 가히 장관이었다. 광대버섯도 울고 갈 화려한 색감의 향연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맞지, 나는 색을 많이 쓰면 쓸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지. 어릴 때부터 그랬다. 24색 크레파스가 눈앞에 있으면 24색을 다 써서 그림을 그려야 직성이 풀렸다. 이건 앞자리가 5, 6, 7, 8, 9 어떤 숫자로 바뀌든 간에 바뀌지 않을 굳건한 취향이다. 나이를 먹고 매사 눈에 잘 띄지 않는 편이 이롭다는 삶의 지혜를 얻으면서 옷차림은 수수해졌을지언정 발목만큼은 여전히 욕심껏 치장하고 뽐내려는 게 나다. 미래가 선명히 그려지지 않아도 작가라는 직업을 꼭 붙들고 한 줄 한 줄 근면히 써내려가는 사람이 나인걸 어쩌나.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버스에서 나를 알아본 독자분이 있었다. 긴가민가했는데 발목 보고 확신했다고(줄무늬+꽃무늬 양말을 신고 있었다). 어쩌면 30대의 내가 건넨 ‘발목이 화려한 작가 구달’ 타이틀을 잘 이어받는 것에서부터 나의 40대를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웬만한 작가는 거머쥐기 힘든 타이틀이니 말이다. 아니, 양말 같은 작은 기쁨을 손에 쥐는 일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이다.

    굿마더신드롬의 아티초크 그린과 자줏빛 양말, 라세리슈르갸토의 푸른색 양말, 본메종의 진분홍색 솔리드 양말, 하쿠의 노란색 컬러풀 립 삭스, 삭스타즈의 해비 듀티 로우 게이지 삭스 가운데 초록색과 당근색을 골라 장바구니에 넣었다. 연초 긴축 재정을 위해 최종적으로 몇 켤레를 추려야겠지만 일단 컬러풀한 양말을 장바구니에 양껏 때려 담으니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다. 다채로운 색으로 화사하게 빛나는 한 해를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달까? 지갑에 소중히 품은 여의주의 기운까지 보태어, 이 기분 좋은 예감을 연말까지 쭉 이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