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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01. Without trying to show or hide: a cup of coffee.
    • EDIT BY 김정현 | 2024. 1. 21| VIEW : 43

    세상에는 두 종류의 카페가 있다. 시끄러운 카페. 그리고 조용한 카페. 너무 거친 분류인가? 활기차고 경쾌한 분위기의 카페와 고요하고 평온한 기운이 감도는 카페라면 어떨까. 둘을 구분하는 기준에는 소리만 있는 게 아니다. 콘셉트, 인테리어, 식음료 메뉴 구성, 음악, 주인장에게서 풍기는 기운 모두 해당된다. ‘어느 쪽이 더 좋은 카페냐'는 질문은 바람직하지 않다. 저마다 기호에 맞게 즐기면 될 뿐이다. 전자의 매력이 다채로운 자극이 제공하는 즐거움에 있다면, 후자의 매력은 느긋한 휴식이 선사하는 편안함에 있다. 카페 물루는 후자에 속한다.

    혼자 쉬고 싶을 땐 어느 카페로 가면 되냐는 질문에 나는 대답할 테다. 성산동의 물루로 가세요. 서울 지하철 6호선 망원역에서 도보로 6분이면 닿는 작은 카페. 한적한 주택가 골목을 걷다 ‘마덜스가든’이라는 이름의 꽃집을 발견했다면 잘 찾아왔다. 고개를 돌려 꽃집의 화사한 외관과 대비되는 수수한 카페 입구로 들어서 보자. 첫인상부터 풍기는 수수함이 이 공간의 미덕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는 이곳에 앉아 있었다. 혼자였다. 마침 가져온 책은 고독한 이방인으로 살아본 경험을 전하는 어느 신문 기자의 에세이. 책을 읽는 중간 중간에 노트를 펼쳐 당시 머릿속을 떠돌던 고민을 두서없이 끄적거렸다. 고요함이 감도는 연휴 오후에 홀로 커피를 마시는 일은 퍽 쓸쓸했으나 나는 그 시간을 즐겼다. 책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노인의 모습이 유독 느렸으며,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는 주인장의 손짓이 새삼 우아해 보였으므로. 물루에서는 모든 장면이 또렷하게 흘러갔다. 사실은 이전에도 다 본 적 있는 장면들이었다.

    살면서 느는 거라곤 핑계밖에 없는 것 같다. 바빠서, 정신없어서, 울적해서··· 변명하는 와중에 사소한 것들은 사소하다는 이유로 잊힌다. 그러고 보면 30분 전, 1시간 전보다 미세하게 길어진 그림자의 모양에 주목해 본 적이 언제였지? 흘러가는 피아노 한 음 한 음에 귀를 기울였던 적은. 불현듯 떠오른 단상을 수첩에 연필로 옮겨적는 행위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낭만에 살고 낭만에 죽는 내가 모를 리 없다. 매 순간 의식하지 않았을 뿐이다.

    미스터 낭생낭사는 물루에 가면 본모습을 되찾는다. 이 작고 조용한 카페가 선사하는 건 잊혀진 감각과 행동에 다시 집중해 볼 수 있는 환경이다. 잠시나마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쉼터를 만들기 위해 주인장은 공간을 비우고 덜어내는 데 신경 썼다. 하얀 벽과 천. 균일한 색상과 질감의 나무 가구. 삼면을 둘러싼 통유리창.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좌석 간격. 종이에 새겨진 먹색의 드로잉. 말하자면 물루의 키워드는 여백이다. 이곳에서 저 혼자 튀는 컬러나 패턴, 거슬리는 소음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빈자리를 대체하는 건 이런 것들. 드립 필터를 투과한 물이 서버에 졸졸 떨어지는 소리. 히터 바람에 흔들리는 천 가림막. 바닥에 내려앉는 오후의 빛과 그림자. 느리게 퍼지는 앰비언트 뮤직 사운드. 분쇄된 원두가 내뿜는 붉은 과일 향. 비워야만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 있음을 주인장은 알고 있다. 의도적으로 온갖 장식과 자극을 걷어낸 공간은 결국 머무는 사람들 각자의 시간으로 채워진다는 사실도. 그에겐 ‘내 가게를 어떻게 장악하고 통제할까’보다 ’손님의 시간을 어떻게 보장할까’가 더 중요한 질문이다.


    국립국어원 우리말샘에 따르면 ‘미니멀(minimal)’이라는 단어는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정도의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누가 봐도 미니멀한 카페라고 말할 법한 물루의 여백은 허전한 빈틈이 아닌 깨끗한 가능성에 가깝다. 그 여백에 어떤 풍경과 이야기가 들어서는지 궁금한 이들에게 방문을 권한다. 따뜻한 드립 커피에 쇼콜라 케이크까지 곁들인다면 배로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덧. 물루(mulu)는 장 그르니에의 <섬> 연작 중 [고양이 물루]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책을 읽고서 어떤 식으로든 써먹고 싶어 기억해 뒀던 고양이의 이름이 훗날 가게 상호로 이어질 줄은 주인장도 알지 못했다. 나는 물루가 어떤 캐릭터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카페명을 고양이가 차지하게 된 작금의 사태(?)에 무조건적 지지를 보낸다.

    카페 물루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6길 8
    @cafe.mul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