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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EP14. That's how you become a sock philanthropist.
    • EDIT BY 구달 | 2024. 2. 7| VIEW : 42

    얼마 전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서 샤이니 키 솔로 콘서트가 열렸다. 드레스 코드는 블루. 공연이 펼쳐진 양일간 공연장 인근은 코발트블루부터 스카이블루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파란색 인간들로 넘실거렸다. 그 푸른 물결 속에는 물론 엄마의 블루 체크 외투를 빌려 입고 일요일 공연을 보러 출동한 나도 있었다. 함께 표를 끊은 친구는 옷장을 샅샅이 뒤져 겨우 발굴했다면서 청록색 풀오버를 입고 왔다. 참고로 우린 둘 다 파란색이 절망적으로 안 어울리는 파워 웜톤이다…. 유난히 노랗게 동동 뜬 얼굴에 웃음을 잔뜩 머금고 파란색 인파에 섞여 공연장에 들어서며 생각했다. 우린 참 성실하게 사랑하는 팬들이야.

    무대 위에서 열정적으로 공연을 펼치는 아티스트가 그저 흔들리는 면봉처럼 보일 뿐인 대형 공연장의 일명 ‘하늘석’에 앉게 된 팬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콘서트는 내가 보러 가는 게 아니라, 나를 보여주러 가는 거라고.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내가 누군가의 팬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만들어준 말이기 때문이다. 팬은 아티스트를 소비하면서 에너지를 얻는 동시에 그렇게 얻은 에너지를 아티스트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다. 그것이 우리가 옷장에 파란색 옷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입고 객석을 파랗게 물들이는 이유다. 혹여 공연 도중에 응원봉이 꺼질 새라 여분의 건전지를 바리바리 챙기고, 정확한 타이밍에 “김기범!”(키의 본명)을 외치기 위해 응원법을 달달 외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은 이렇게 당당히(?) 덕질한 썰을 글로 풀기도 하지만,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좋아하는 마음을 감추는 사람이었다. 애호하는 것들을 내면의 곳간에 착착 쌓아올리고 혼자서 은밀히 즐기는 타입. 내 취향을 타인에게 함부로 평가받고 싶지 않다는 방어 심리도 있었다. 어느 순간 곳간의 빗장을 풀고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게 된 데에는 여러 계기가 있을 테지만, 나에게도 ‘팬’이 생긴 영향이 가장 클 것 같다. 내가 쓴 책을 읽고 정성껏 리뷰를 적어 SNS에 올려주는 분들. 누추한 작가의 북토크에 일부러 찾아와 사인을 받으며 팬이라고 속삭이는 다정한 분들. 나 또한 아주 오랫동안 누군가의 팬으로 살아왔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그분들이 얼마나 큰 용기와 애정으로 내 글을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나는 성실하게 사랑하는 팬이 되는 방법을 기꺼이 나의 팬이 되어준 작고 소중한 분들을 통해 배웠다.

    좋아하는 소설가가 신작을 발표하면 잽싸게 구매해 읽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명작 탄생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좋아하는 그림 작가가 전시를 열면 잽싸게 달려가서 구경하고 동네방네 자랑한다. 작년 이맘때쯤 서교동의 작은 서점에서 열린 《모 이야기》 출간 기념 전시에도 부리나케 다녀왔었다. 애정하는 브랜드 후긴앤무닌의 ‘모대리’가 털[毛] 많은 모델 겸 대리가 되기 전에 겪은 모험담을 그린 그림책이 출간되었다는데 아니 출동할 수 없지. 서점 곳곳을 채운 원화와 지점토 인형, 패브릭 소품을 하나하나 구경하며 행복해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매장에 입고된 삭스타즈x후긴앤무닌 콜라보 양말을 정성스레 진열했다. 그리고 보니 세상 감개가 무량하다. 열렬한 팬이었던 양말 가게 삭스타즈에서, 애정하는 후긴앤무닌의 모대리가 그려진 양말을 1등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나라니. 이것이 이른바 성덕의 삶일까. 성덕임을 깨달은 기념으로 제 꼬리를 깔고 털썩 주저앉은 모대리 양말을 크림색으로 한 켤레 샀다. 내 눈에는 모대리가 털썩 주저앉아 검은색 니삭스를 신을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다른 양말 덕후 아니 손님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