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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EP14. That's how you become a sock philanthropist.
    • EDIT BY 구달 | 2024. 3. 11| VIEW : 45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이 머지않았다. 때맞춰 내 안의 패션 본능도 꿈틀꿈틀 깨어난다. 저기 바다 건너 제주도를 노랗게 물들였다는 유채꽃마냥 화사하게 차려 입고 싶다. 새빨간 초장에 조물조물 무친 돌나물 무침처럼 산뜻하고 새콤한 룩을 연출해 보고 싶다. 이번 봄에는 또 어떤 패션이 유행하려나? 거실에 비쳐드는 따스한 봄볕을 쬐며 소파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2024년 S/S 시즌 패션 트렌드 채집에 나섰다. 1990년대 풍의 미니멀리즘이며 사랑스러움을 한껏 강조한 걸코어 등 여러 키워드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단어는 ‘긱시크’다. 괴짜를 뜻하는 ‘긱(geek)’에 멋짐의 극치인 ‘시크(chic)’를 붙이다니, 이 무슨 소리 없는 아우성 같은 표현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러니까 미드 〈가십 걸〉의 블레어한테 〈빅뱅 이론〉 에이미의 뿔테 안경을 씌우면 얼추 비슷한 느낌일지…. 요즘 유행 따라가기 쉽지 않다.

    어쨌거나 ‘긱’이 붙은 패션이 유행한다는 건 양말 애호가에게는 희소식이다. 우리네 양말 서랍에는 이미 긱스러운 아이템이 가득하니 말이다. 괴짜 중의 괴짜인 말괄량이 삐삐만 해도 짝짝이 양말을 무릎까지 올려 신는 것으로 저만의 독특한 개성을 표출하지 않았던가. 괴짜 느낌을 내기 위해 구태여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쓸 필요가 없다. 눈썹을 탈색하거나 머리카락을 총총 땋을 필요도 없다. 양말만 잘 활용하면 올해의 유행 판도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을 터이니. 짙은 남색 트렌치코트에 노란색 줄무늬 양말을 신으면 어떨까? 세련된 회색 원피스에 알록달록 촌스러운 양말을 매치한다면? 오래 입어 익숙해진 옷들에 양말로 다채로운 변주를 줄 궁리를 하니 온갖 재미난 아이디어가 솟구친다.

    올봄 패션 동향 체크를 마쳤으니 이제 실전에 적용할 차례. 우선 옷장을 열고 ‘시크’를 맡아줄 옷가지 발굴에 나섰다. 일자로 툭 떨어지는 블랙 원피스와 각진 어깨가 포인트인 빈티지 블랙 재킷이 눈에 띈다. 일 년에 한두 차례 경조사가 있을 때만 꺼내 입던 이 녀석들을 올해는 적극 활용해야겠다. 여기에 무늬는 현란하되 색감은 빈티지한 양말을 신으면 완벽할 것 같은데 아차차, 지금 내 양말 서랍에는 쨍한 컬러 양말만 삼백 켤레다…. 새 양말이 필요하다.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양말 가게 전경을 떠올렸다. 진열대를 (가상으로) 훑으며 긱시크 패션의 화룡정점이 되어 줄 양말을 찾아 나선다. 첫 번째로 고른 건, 대담하게도 다홍색으로 칠한 새와 시원시원하게 그려 넣은 꽃송이가 어우러진 더없이 화려한 양말. 두 번째는 진한 노란색 가로줄이 경쾌하게 그어진 줄무늬 양말. 세 번째는 고풍스러운 차림새로 난간에 팔꿈치를 괸 채 몽상에 빠진 시인이 그려진 자줏빛 양말. 고르고 보니 공교롭게도 전부 본메종 제품이다. 유행의 흐름을 미리 읽은 겐지, 이번 시즌 본메종에서 선보인 과감한 패턴과 빈티지한 색 조합이 긱시크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탓이다.

    긱시크란 무엇인가. 긱시크를 즐기는 이들은 자신의 괴짜스러움을 쿨하게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멋으로 승화시킨다. 그러니 긱시크란, 내면 깊숙이 꽁꽁 감춰 두었던 다소 이상하고 모난 취향을 끄집어내어 마음껏 표현해도 좋다는 일종의 승인인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양말 러버에게 이만한 호시절이 없지 싶다. 우리가 그 어떤 오색찬란한 양말을 신어도 다들 긱시크려니 하고 기꺼이 받아들여 줄 테니 말이다. 좋아하는 양말을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신고 즐기기 좋은 계절이 왔다.